리비우스, 「로마사 I」 이종인 역 (파주: 현대지성, 2018), 125-9쪽.
3. 모든시민은 타르퀴니우스 가문과의 씨움이 확실히 벌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그전쟁은예기치못한방식으로연기가되었고, 갈등의 첫 번째 단계는아무도 예상하지 못한형태로구체화되었다. 로마시내에서 대역죄가발생하여 로마는자유를 거의 잃을 뻔했다. 그것은 한무리의젊은 귀족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왕가의 젊 은친구들과지유롭게 어울려 놀던 군주제 시절의 생활이 이주 쾌적했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욕구를 마음대로 발산할 수 있었고 또 궁정의 방당하고 무책임한 생활을 그리워했다. 새로운 제도 아래에서그들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없는 걸 아쉬워했고 남들게게는 자유인 것이 그들에게는 노예제도 같다고 불평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이런주장을폈다: 왕은 결국 사람이므로,그 왕으로부터 옳든 그르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낼 기회가 있었다. 군주제 아래에서는후원과특혜의 여지가있었다. 왕은 화를 낼 수도 있으나 후에 용서도 해준다. 그는 적과 친구의 차이를안다. 반면에 법률은 몰개성적이고냉혹하다. 법률은 귀가달려 있지 않다. 물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아주 좋은 것이지만, 위인들에게는 쓸모 없는데 그치지 않고 그보다 더 나쁜 것이다. 평범한 규정의 범위 바깥으로 나아가며 모험을 시도하는 남자에게 정상참작이나 관용 같은 게 아예 없기 때문이다. 인간성은결코 완벽한 것이 아니므로, 인간이 법률의 통치 아래에서 아주 순수한 상태로 살 수 있다고생각하는 것은 아무리 좋게 말한다 해도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무렵 불평불만자들에게는 안성맞춤하게도 타르퀴니우스 가문이 보낸 사절이 로마에도착했다. 그 사절이 겉으로 내세우는 유일한 목적은 타르퀴니우스의 재산을 되찾겠다는 것이었고, 그들의 로마귀환에 대해서는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사절은 원로원의 청문회에 참석할 수 있는 허가가 떨어졌다. 그후 며칠 동안 재산 반환 문제가 논의되었는데 전반적인 의견은 이러했다. 재산 반환을 거부하는 것은 전쟁의 빌미를 제공할 것이고, 반대로 반환을 허가한다면 적의 재산을 늘려주는 꼴이 될 것이다. 한편 타르퀴니우스의 사절들은 가만히 놀고 있지는않았다. 그들은여전히 재산 반환이란느 원래의 구실을 내세우면서도 은밀하게 왕권의 회복을협상했다. 정당한 임무 수행인 양 가장하면서 그들은 다수의 젊은 귀족들을 방문하여 현 시국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 무엇인지 알아내려 했다. 일부 귀족들은 분명한 동조의 뜻을 보였는데, 사절들은 그들에게 타르퀴니우스의 가문의 친서를 전달하면서, 야음을 틈타서 타르퀴니우스 가문 사람들을 로마에 몰래 들여놓는 절차를 논의했다.
4 비텔리 형제와 아퀼리 형제가 최초로 그 계획을 위임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비텔리의 누나가 브루투스와 결혼하여 티투스와 티베르누스의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제 막 성년으로 발돋움하던 두 청년은 외삼촌 비텔리에게 설득당하여 그 음모에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다수의 귀족 계급 청년들이 그 비밀 모의에 가담했으나 이들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한편 원로원은 과반수 투표로 타르퀴니우스 재산의 반환을 의결했다. 두 집정관은 사절들에게로마에 한 동안 머물면서 가구와 동산을 싣고 갈 운송수단을 준비하라며 시간적 말미를 주었다. 그들은 이 시간을 활용하여 젊은 음모꾼들과 빈번히 상의를 했고, 타르퀴니우스 가문에 보여줄 증거가 필요하니 젊은 귀족들에게 끊임없이 서면약조를 요구했다. 그들은 이렇게 주장했다: 서면증거가 없다면, 어떻게 이런 중요한 일에서 왕가 사람들이 그들의 진심을 믿을 수 있겠는가? 음모꾼들은 그런 설득에 넘어갔다. 그들은 편지를 작성하여 서명했다. 그것은 그들의 신의를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결국 그들의 유죄를 입증하는 문건이 되어버렸다.
사절들이 로마로 떠나기로 된 날 전야에 그들과 음모꾼들은 비텔리 가문의 집에서 만나 저녁식사를 했다. 저녁시간에 그들은 하인들을 모두 방에서 내보냈고 그들만 있는 줄 알고서 음모의 세부서항들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 음모 건은 아직도 그들에게 신기함의 흥분을 안겨주고 있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한 노예가 그들이 하는 말을 엿들었다 그는 이미그 전에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했으므로 약조의 편지가 타르퀴니우스의 사절들에게 건네지기만을 기다렸다. 일단 그편지를 압수한다면 그에게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터였다. 그는 그 편지가 교환되었다는 것을 발견한 즉시 그 정보를 두 집정관에게 밀고했다. 집정관들은 즉시 집에서 나와 범인들을 체포하러 갔다. 음모는 아무런 소요 사태도 일으키지 않고 구상단계에서 발각되었고, 약조의 편지들을 확보하기 위해 각별한 노력이 기울여졌다. 반역자들은 즉각 투옥되었다. 사절들의 신병 처리에 대해서는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다. 그들의 행위로 미루어보면 적으로 취급해야 마땅하지만, 외국의 사절이라는 관습적인 특혜가 부여되었다.
5 타르퀴니우스의 재산 처리 문제가 원로원에서 재고되었다. 이번에는 원로원 내에 분노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원로원은 반환을거부하면서, 공식적으로 몰수하는 것도 거부했다. 그 대신평민을 풀어서 그들 마음대로 그 재물을 노략질해도 좋다고 허가했다. 하층 계급의 사람들이 왕가의 황금에 손때를 묻힌다는 것은 곧 그들이 다시 왕가와 화해를 시도하려는 희망을 영구히 포기한다는 뜻이었다. 로마시와 티베르 강 사이의 땅은 전에 타르퀴니우스 가문의 소유였고 마르스 신에게 바쳐졌기 때문에 캄푸스 마르티우스로 알려졌다. 그 땅의 곡식들이 이미 익은 상태였다. 종교적인 이유로 인해 그 곡식은 먹을수 없으므로, 함께 일하는 수백 명의 남자들이 줄기 채 베어서 여러 바구니에 집어넣어 티베르 강에 내던졌다. 한여름에는 늘 그렇듯이 강물의 수위가낮았고, 곡식을 담은 바구니들은 얕은 물의 바닥에 갇히는 바람에 진흙 무더기가 되었다. 여기에 하류로 흘러가는 쓰레기들이 합쳐져서 서서히 자그마한 섬이 생겨났다. 나중에 이 섬을 높고 단단하게 보강하는 토목작업이 벌어져서 이 섬에 건물을 세울 수 있게 되었었고 심지어 사원이나 주랑(柱廊)도 들어서게 되었다.
타르퀴니우스 가문의 모든 재산이 평민에 의해 약탈되어 파괴되있을 때 반역자들은 선고를 받고 처벌되었다. 그것은 기억할 만한 광경이었다. 왜냐하며 브루투스는 집정관의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두 아들에게 극형을 내리는 의무를 수행해야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중에서 아들의 처형을 바라보는 광경을 면제받아야 마땅한 사람이 바로 그 처형을 명령해야 하는 운명에 놓인 것이다. 선고를 받은 죄인들은 나무기둥에 결박되었다. 모두가 로마 최고 가문의 젊은 자제들이었으나 오로지 집정관의 두 아들만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다른 죄인들은 구경꾼의 흥미를 끌기는 했지만 비천한 사회 밑바닥 출신일 수도 있었다. 두 아들이 받아야 할 처벌을 불쌍하게 생각했고 또 그런 처벌을 받게 만든 범죄에 대하여 더욱 애처롭게 생각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국가의 중대한 시기에 그런 배신행위를 저지르다니 믿기지 않는 슬픔이 가득했다. 그들의 아버지가 로마를 해방시키고 왕위 대신에 집정관 직을 설치하여 그 자리에 오른 그 해에 두아들이 로마의 모든 시민들과 신들을 배신하다니! 그것도 한때 오만한 폭눈이었다가 지금은 유배지에서 로마를 파괴하려고 획책하는 그 자에게 붙었다니!
두 집정관은 심판대에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릭토르들은 사형을 집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죄수들은 옷을 벗긴 후 매질을 하고 이어 목을 쳤다. 그 슬픈 광경이 진행되는 동안 구경꾼들의 이목은 모두 그 아버지의 얼굴에 집중되었다. 그 얼굴에는 아버지의 고뇌가 뚜렷하게 드러나 있었다.
처형 후에 제보자는 포상을 받았다. 포상금 이외에 노예에서 면천되고 시민의 권리를 부여되었다. 이러한 포상은 대역죄를 억제하려는 처형의 효과를 두 배로 높일 것으로 기대 되었다. 제보자는 빈딕타(vinicta: 막대기. 작은 막대기를 종의 머리에 놓고 자유인임을 선언 했음)에 의해 속량된 최초의 노예인 것으로알려졌다. 어떤 사람은 빈딕타라는 용어가 그의 이름 빈디쿠스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 후 이런 식으로 면천된 노예는 온전한 시민권을획득한 것으로 보는 게 하나의 관습으로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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