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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4 | 크리스천은 무엇을 구하는가? | 카리스 교회 주일예배

주보와 설교

by unclechang 2024. 2. 4.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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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카리스 교회 이창우 목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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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4일 설교 및 주보

설교 제목: 크리스천은 무엇을 구하는가?

본문말씀:  145편 14-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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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가 구하는 만족

먼저 본문 말씀을 이야기하기 전에 저는 공리주의를 소개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특히, 공리주의자 중에 존 스튜어트 밀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그가 오늘 주제와 관련하여 그의 책 공리주의⟫(1861) 재미있는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배부른 돼지가 되기보다 배고픈 인간이 되는 편이 낫고, 만족하는 바보가 되기보다는 불만족스러운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더 낫다.”

 

그가 왜 이런 말을 남겼을까요?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먼저 공리주의의 문제점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밀은 공리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이전 공리주의자였던 벤담에 반대했습니다. 벤담의 유명한 말을 소개하면 아마 최대 다수 최대 행복(Greatest Happiness Principle)”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 그는 도덕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목적으로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예들 들어, 벤담은 거리에서 거지를 만나게 되면 만족스럽지 못하며, 행복이 줄어든다는 것이지요. 그 거지 한 사람 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불쾌해지면 행복지수가 낮아집니다. 따라서 그는 최대 다수의 행복을 위해, 거지들을 모아 별도로 관리하는 구역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공리주의의 핵심은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의 자유는 억압되어도 된다는 사상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점에서 공리주의는 언제나 이익을 따집니다. 어느 것이 더 이익이 되는지 계산기를 두드려 봐야 합니다. 그래서 칸트와 같은 철학자는 공리주의를 극렬히 반대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을 정당화했을 뿐더러, 모든 도덕적 원리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일 정도로 정해진 바가 없습니다. 모든 도덕적 원리가 이익, 계산 결과에 따라 결정된다는 점에서 정해지지 않는 최대의 단점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벤담의 공리주의는 만족과 쾌락만 추구하고 고통은 언제나 제거 대상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공리주의자입니까, 아닙니까?

나는 공리주의자가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한 가지 예화를 들어 소개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세종시에 살고 있습니다. 세종시에는 중요한 정부 기관들이 있습니다. 어느 날 테러리스트 한 명이 세종시에 나타나 어딘가 중요 기관에 시한 폭탄을 설치했다는 것입니다. 폭탄이 언젠가 터지게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테러리스트가 경찰에 의해 잡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폭탄을 어디에 설치 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어디에 설치했는지 다 털어놓을 때까지 그를 고문할 수 있습니다. 가혹한 고문을 가할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한쪽 눈을 찔러서 실명이 되게 할 수도 있고 그 다음에는 더 심한 고통을 가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이 테러리스트를 고문하는 것에 대해 찬성하십니까, 반대하십니까?

 

찬성하셨다면, 여러분 역시 공리주의자 중에 한 사람입니다. 사실, 거지를 한 장소에 모으는 것도 극단적인 공리주의이지만, 테러리스트의 고문을 정당화하는 것 역시 또 다른 공리주의입니다. 아마 철학자 칸트였다면 이런 고문에 반대했을 것입니다. 현재 우리 나라는 고문이 불법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고문이 합법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테러리스트도 사람입니다. 그런데 테러리스트이기 때문에 고문을 해도 된다는 말인가요?

수많은 사람의 목숨과 사악한 테러리스트의 목숨 한 명과 비교할 때, 저런 목숨 하나는 죽어도 좋고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더 이익이 되기 때문 아닌가요? 이것 역시 도덕을 계산기를 두들긴 결과 아닌가요?

테러리스트의 고문이 정당하다고 주장할 것 같으면,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예들 들어, 테러리스트에게 예쁜 딸이 있다고 상상해 봅니다. 이때, 테러리스트를 고문하지 말고 차라리 그의 하나밖에 없는 예쁜 딸을 데려오십시오. 그리고 그가 폭탄을 어디에 설치했는지 자백할 때까지 딸을 고문해 보십시오. 아마 훨씬 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이런 벤담의 공리주의에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도덕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됩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벤담의 공리주의는 소수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옛날 초대 교회 때에 많은 크리스천들이 박해를 받다가 죽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유명한 이야기로, 쿼바디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 당시 크리스천은 수많은 로마인들의 쾌락과 만족을 위해 사자밥이 되어 죽어야 했습니다. 콜로세움이라는 로마의 경기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사자밥에 돼서 죽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아마 사자밥이 되어 죽는 크리스천들은 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자유는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결론적으로, 벤담의 공리주의는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공리주의자들은 크리스천들이 죽는 것을 찬성했을까요, 반대했을까요?

아마도 그들은 찬성했을 것입니다. 소수의 크리스천들이 사자밥에 되어 죽는 것과 수많은 군중들이 즐거워하는 것과 비교할 때, 소수의 죽음은 다수의 행복을 위해 희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테러리스트를 고문해야 하는 것과 똑같은 논리입니다. , 그들은 언제나 자신의 만족을 추구했습니다. 하지만 죽을지 살지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크리스천에게 있었다면? 아마 그들은 살기를 구했을 것입니다.

 

공리주의자였지만, 밀은 1859자유론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아마도 그는 이런 치명적인 공리주의의 약점을 극복하고자 했던 같습니다. 그리하여 밀은 다른 공리주의자들과 달리, 크리스천이 사자밥이 되어 죽는 것을 반대했을 것입니다. , 이제 처음에 질문했던 주제도 다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밀은 만족하는 바보가 되는 것보다 차라리 불만족하는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낫다고 말했습니다. 그랬을까요?

 

그는 쾌락, 혹은 만족을 구분하고자 했습니다. 벤담은 인간의 쾌락을 양적으로만 따졌지 질적으로 구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벤담의 공리주의를 양적 공리주의라 부르고, 밀의 공리주의를 질적 공리주의라고 부릅니다. 밀은 크리스천이 사자밥이 되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즐기는 것을 아주 저질스러운 쾌락이라고 비판했을 것입니다. 이런 류의 쾌락이 돼지 만족인 것이고요, ‘바보 만족입니다. 밀은 저급 쾌락보다는 고급 쾌락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이 공리주의자인 이유는 그는 만족함(쾌락)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행복을 증진할수록 옳은 행동이며, 행복을 줄일수록 나쁜 행동이다. 행복이란 쾌락(만족) 있고 고통은 없는 상태이며, 불행이란 고통이 있고 쾌락(만족) 부족한 상태다.”라고 말했습니다.

 

 

밀의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대다수의 사람들은 클래식 음악과 대중가요 중에 어떤 음악을 들을 것이냐 묻는다면, 대중 가요를 듣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다시 사람들에게 어느 것이 더 고급인지를 물으면, 클래식이라고 대답한답니다. 사람은 고급 만족이 무엇인지 압니다. 하지만 고급 만족을 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아마도 가장 문제라고 생각이 됩니다.

 

 

크리스천의 구하는 것

너무 먼 길을 돌아, 다시 시편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오늘 시편 본문은 중요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공리주의자들과는 이상하게도 상황이 다른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아마 벤담 같았다면, 당장 불쾌하다고 쫓아낼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이 사람들이 넘어지는 자들”, “비굴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그들은 세상에서 소외된 자들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벤담이 격리시키기 원했던 사람일 수 있습니다. 충격적으로, 오늘 본문은 그들이 주를 앙망할 때,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그들의 소원을 만족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17절은 여호와께서는 모든 행위에서 의로우시고 모든 일에 은혜로우시다고 전합니다.

 

공리주의자들은 이익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만족을 구했고, 쾌락을 구했습니다. 다수의 행복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경제학의 대전제에 의하면 인간은 만족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욕망은 무한해서 어느 것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관점에서 만족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전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주님을 믿는 크리스천은 무엇을 구해야 하나요?

먼저, 크리스천은 일용할 양식을 구합니다. 그 이상을 구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만족할 줄 모르는 동물입니다. 아마 이런 점에서 본다면, 아무리 가난한 새도 이보다 더 가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비극입니다. 왜냐하면 새는 물 한 모금에도 만족하는 반면, 사람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만족할 줄 모르니까요.

중요한 점은 일용할 양식만을 위해 기도하고 이것을 만족할 수 있다면? 저는 이것을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불가사의한 큰 일을 행하는 것만 기적이 아니고, 가장 작은 것, 아무것도 아닌 일용할 양식에 만족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얼마나 큰 기적인지는 수많은 과학, 경제학, 심리학 및 철학이 입증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것이 만족될 수 있는 요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말씀을 더욱 깊이 묵상한다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만으로는 대답이 완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무언가 추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크리스천은 무엇을 구해야 하나요?

크리스천은 공리주의자들처럼 만족을, 쾌락을 구하지 않습니다. 다수의 행복을 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주실 수 있는 것, 오직 하나님만이 가져오시는 선물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만족을 주시는 하나님만을 구합니다. 오직 그분의 나라와 의를 구합니다. 그리하여, 시편 본문에 의하면, 의로우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만을 원하는 것이지요. 마태는 이것을 정확하게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다시 밀의 이야기로 돌아가보겠습니다.

배부른 돼지가 되기보다 배고픈 인간이 되는 편이 낫고, 만족하는 바보가 되기보다는 불만족스러운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더 낫다.”

 

이 이야기는 고상해보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있습니다. 밀은 여전히 질적인 만족을 추구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크리스천이 구하는 것은 배부르게 되는 것, 만족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를 구합니다. 이런 점에서 그가 받은 일용할 양식에 감사할 때, 사는 것이란, 단 한번도 이 땅에 부함을 허락하지 않는 그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 그 은인에게 기도하고 감사하는 것, 이것이 사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또한, 우리는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새와 크리스천의 공통점은 일용할 양식으로 산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새는 구하지 않는 데도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반면, 크리스천은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고 구한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하지만 본질적인 차이는 아닙니다.

 

 

새와 사람은 어떤 점에서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것일까요?

사람은 떡으로만살 수 없다는 점에서 새와 본질적으로 구별됩니다. 주님은 40일 동안 굶주리셨을 때,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십니다. 배고픈 주님에게 사탄은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말합니다. 그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4: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이 말씀에 의하면, 사람은 떡으로만, 물질적인 양식으로만은 만족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확실히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는 새와는 다릅니다. 인간의 결핍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크리스천은 이것을 믿습니다.

 

밀은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했지만, 크리스천은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이 사랑이 많으신 분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믿습니다.(10:29) 새는 이것에 대하여 무지합니다. 새에게는 아무리 가르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런 새에 비하면, 스튜어트 밀은 참으로 비극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무지한 것이 아니라, 알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이런 지식에는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삶이 음식보다 더 중요하다.”(6:25) 이 부분이 개역개정 성경에는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라고 되어 있는데, 목숨은 으로도 옮길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음식보다 더 중요하다면, 영원한 삶은 먹고 마시는 것과는 전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나님 나라의 삶이 먹고 마시는 것으로 구성될 수 없듯, 사람의 삶 역시 이런 것들로 구성될 수 없습니다. 이것을 가난한 크리스천은 명심합니다. 주님은 광야에서 굶주리셨고, 십자가에서 목마르셨다는 것을 명심합니다. 그리하여 사람은 가난하게 살 뿐 아니라 가난 중에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합니다. 물론, 이것은 크리스천이 가난하게만 살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얼마든지 크리스천 역시 부하게 살 수 있으나,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결론적으로, 크리스천은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고 감사합니다. 하지만 새는 이것을 하지 않습니다. 크리스천은 떡으로만 살 수 없습니다. 이방인은 남은 것이 풍족해 먹기 위해 사는 반면, 크리스천에게 삶이 음식보다 중요하듯, 기도와 감사는 먹고 마시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양식이듯, 기도와 감사는 크리스천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https://youtu.be/33gap0uvgfM?si=_HgGE2AxkfrOxXG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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