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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스 교회 이창우 목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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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18일 설교 및 주보
본문말씀: 빌립보서 4: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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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성 아르세니우스라는 사람이 알았습니다. 그는 서기 350년 로마의 기독교인이자 로마 원로원 의원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훌륭한 교육을 받고 수사학과 철학을 공부했으며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마스터했습니다. 그의 부모가 죽은 후, 그의 여동생 아프로시티(Afrositty)는 처녀 공동체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는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부하고 금욕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아르세니우스는 정의로움과 지혜로 유명해졌습니다.
아르세니우스는 교황 다마수스 1세에 의해 부제로 서품되었고, 교황은 그를 비잔틴 제국의 황제 테오도시우스에게 추천했습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383년경 그라티아누스 황제와 다마수스 교황에게 요청하여 아르세니우스를 자신의 아들들(후에 아르카디우스 황제와 호노리우스 황제)의 가정교사로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아르세니우스는 그리스 문학을 잘 읽었기 때문에 선택되었습니다. 그는 383년에 콘스탄티노플에 가서 황실에서 11년간 계속 교사로 일했습니다. 마지막 삼 년 간은 원래 그의 학생이었던 아르카디우스의 형제인 호노리우스도 가르쳤습니다. 그는 훌륭한 집에 살았지만, 항상 세속을 버리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황실에서 살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모든 이의 눈에 드는 은혜를 주셔서, 그들은 모두 그를 사랑했습니다. 어느 날 기도 중에 그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에게 구원받는 법을 가르쳐 주옵소서.”
하나님의 목소리가 복음서를 통해 그에게 들렸습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16:26)
그는 콘스탄티노플을 떠나 알렉산드리아의 해변으로 갔다가, 사막으로 달아났습니다. 그가 처음 스케티스 수도승들의 스승인 대 마카리우스에게 찾아갔을 때, 마카리우스는 그에게 난장이 성(saint) 요한에게 가라고 권유했습니다.
400년경 그는 이집트 스케티스의 사막으로 가서 그 곳에 사는 은둔자들에게 자신을 받아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는 난장이의 성 요한에게 지도 받았는데, 요한은 지원자의 자질을 시험하기 위하여, 아르세니우스를 옆에 세워두고 본체만체 하며 다른 방문자들과 식탁에 앉았습니다. 식사가 반 쯤 끝났을 때 요한은 빵을 아르세니우스 앞에 던지며 무관심하게 먹으려면 먹으라고 했습니다. 아르세니우스는 바닥에 앉아 유순하게 빵을 집어 들고 먹었습니다. 그의 겸손을 증명하기에 충분했으므로, 요한은 그를 지도하기로 했습니다.
이 신참자는 그의 어떤 오래된 습관을 자기도 모르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리를 꼬고 앉는다 거나 한 발을 다른 발 위에 올려놓는 행위 등을 말입니다. 그래서 원장은 이것을 알고는 한 수사에게 아르세니우스의 자세를 다음 모임에서 따라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그를 꾸짖었습니다. 아르세니우스는 자기 잘못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고쳤습니다.
434년 그는 마지치(리비아의 부족)족이 수도원을 침략했으므로 그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는 트로에(멤피스 근처)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는 그가 트로이로 돌아가 445년에 95세의 나이로 죽기 전까지 거기서 15년을 광야를 돌아다니며 지냈습니다.
55년의 은둔생활 동안 그는 언제나 가장 초라한 옷을 입음으로써 그가 전에 세속에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한 것에 대해 스스로를 벌했습니다. 또한 궁정에서 향수를 사용했던 것에 대한 보상이었습니다. 그는 그가 야자 잎으로 만든 자리에 수분을 공급하는 물을 결코 갈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것이 버려진 것인 것처럼 깨끗한 물을 부어서 그것에서 극도의 악취가 나게 했습니다. 극심한 육체 노동에 종사하는 동안에도 그는 기도에 전념하는 데 결코 쉬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그의 눈에서는 통회의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그러나 그를 가장 돋보이게 한 것은 하나님과의 연합을 방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오랜 수색 끝에 은둔처가 발견되었을 때, 그는 궁정으로 돌아가 자신의 옛 제자이자 현재 로마 황제인 아르카디우스의 고문으로 활동하는 것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과 이웃 수도원들을 돌보는 일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방문객의 지위와 상태에 관계없이 항상 자신을 거부하고 제자들에게 그들을 대접하는 일을 맡겼습니다. 아르세니우스는 매우 조용하고 종종 침묵을 지켰던 사람으로, 그의 격언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말을 한 것을 여러 번 후회했지만 침묵을 지킨 것을 후회한 적은 없다."[1]
그는 살았으나 죽은 자였으며,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였습니다. 어느 날 관리 한 사람이 원로원 의원의 유서를 가지고 아르세니우스를 찾아왔습니다. 그 의원은 아르세니우스의 가족이었는데, 그에게 막대한 유산을 남겨주었습니다. 아르세니우스가 유서를 찢으려 하자 그 관리는 그의 앞에서 엎드리며 부탁했습니다.
“부탁입니다. 찢지 마십시오. 그것을 찢어버리시면, 저들이 내 목을 칠 것입니다.”
아르세니우스는 말했습니다.
“나는 얼마 전에 죽은 이 원로원 의원보다 훨씬 오래 전에 죽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겠습니까?”
아르세니우스는 세상의 모든 유한한 것들을 포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세속적인 재산 상속조차 아무 관심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그는 가난한 사람일까요, 아니면 부한 사람일까요? 만약 아르세니우스가 부한 사람이라면, 그의 부와 세상의 부와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보면, 세상의 부는 얼마나 가난합니까!
이 땅의 부함이란 죽음과 관계할 때, 언제나 가난해집니다. 사람이 죽은 후에 그 재물을 가져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이러니하게 그는 세상에서 부하면서도 가난합니다. 만족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 대하여 죽은 크리스천은 가난한 중에도 가난의 염려가 없습니다. 기적 같지만, 그는 가난한 중에도 만족합니다. 게다가, 그는 세상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살고 있습니다. 그는 이방인과 달리, 죽음 후에도 여전히 부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늘에 재물을 쌓아두었기 때문입니다.
[마6:19-20]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새는 죽음에 의해 사는 것을 멈춥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영적으로 죽음과 함께 삽니다. 영적인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 이방인도 역시 그 상태는 새와 같습니다. 즉, 그의 부함은 죽음과 함께 끝나고 맙니다. 이것이 하늘의 부함과 비교할 때, 즉 크리스천의 가난과 비교할 때 그토록 가난해 보이는 이유입니다. 그가 사는 날 동안 아무리 부유하다 해도 그렇습니다.
이런 점에서 크리스천의 삶은 역설인 것 같습니다. 즉, 세상에 대하여 죽은 사람은 돈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돈을 싫어하는 살아 있는 사람은 실제로 돈이 필요합니다. 그는 아주 부자가 되든가. 이 경우 많은 돈이 필요하겠지요. 아니면, 가난한 크리스천이 되든가 입니다.
우리가 오늘 나눈 아르세니우스와 비슷한 인물이 성경 속에 있습니다. 그는 바울입니다. 그는 정통파 유대인이었고 학식이 풍부한 자였습니다.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었고, 베냐민 지파, 히브리인 중 히브리인이었으며,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빌3:5-6) 그런 그가 회심을 하고 세상에 유익하다는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모든 것을 버리고 배설물로 여겼습니다.(빌3:7-8)
그런 그는 세상에 대하여 죽고, 아르세니우스보다 더 끔직하게 감옥에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르세니우스는 적을 피해 사막으로 갔다면, 바울은 적을 향해 돌진 것 같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에 대하여 죽었지만 그런 세상 속에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말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로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하뢰라.”(빌4:6)
사도바울은 세상 속에서 속박되어 감옥에 있는 상태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궁핍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말합니다.
[빌4:11-13]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가 이렇게 말했다는 것은 그는 이미 궁핍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감옥에 있기도 하고요. 그런 그가 배운 것은 ‘만족하는 법’이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운 것이지요. 그런 사도 바울에게 “능력 주시는 자”는 누구일까요?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도바울은 다른 곳에서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딤전1:12)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로 능력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한국에서 가장 오해받고 있는 구절 중에 하나가 이 말씀인 것 같습니다. 식당이나 가게나 많은 기독교 점포에서 활용하고 있는 구절 중의 하나가 바로 이 구절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능력을 원합니다. 즉,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원합니다. 하지만 본문의 의미로 이해하자면 이것은 어떤 환경을 변화시키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능력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내면성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즉, 사도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그는 그의 환경을 바꿀 수도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그는 어떤 기적을 바라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능력이란 환경을 개선시키고 바꿀 수 있는 능력이라기보다는 ‘적응 능력’ 같습니다. 그는 어떤 환경이 오더라도 만족할 수 있는 소유자였습니다.
여러분은 누가 부한 자라고 생각하십니까? 부한 이방인입니까, 사막으로 간 성자 아르세니우스입니까, 세상으로 다시 들어가서 현재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입니까? 여러분은 영적으로 얼마나 부함니까? 크리스천은 죽음으로 사는 것을 얼마나 경험하고 있습니까?
https://youtu.be/cXnOBGmvSdE?si=3y_0Q2y0ii-FXGAX
[1] de Sales, St. Francis (2013). The Complete Introduction to the Devout Life. Brewster, Mass.: Paraclete Press. p. 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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