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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0 | 누가 정복자인가? | 카리스 교회 주일 예배

주보와 설교

by unclechang 2023. 12. 10.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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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카리스 교회 이창우 목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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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10일 설교 및 주보

설교 제목: 누가 정복자인가?

본문말씀:  창세기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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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는 세 아들이 있었고, 그 중에 저주받은 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저주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성읍의 건축, 도시의 건설이었음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함의 후손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니므롯이었습니다. 창세기 10장에 보면 그는 도시의 건축자였습니다. 그의 후손들은 드디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고 거기에 바벨탑을 쌓기 시작한다는 것이 오늘 창세기의 본문입니다.

 

오늘날도 도시를 보십시오. 또한, 도시 속에 건축물을 보십시오. 우리는 도시를 상징하는 높은 빌딩을 마천루라고 부릅니다. ‘랜드마크(landmark)’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멀리서 보고도 쉽게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데 도움을 주는 건물이지요. 이로 인해, 그 건물은 이름을 얻게 됩니다. 대기업도 자신의 기업 이미지 제고를 위해 높은 건물을 짓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은 건물이 상징하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에 의하면 도시의 건축과 건물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아마도 4절의 말씀이 결정적인 것 같습니다.

 

[11: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그들은 도시를 건축하고, 건물을 건설하면서 우리 이름을 내고라고 말합니다. 왠지 이 말은 오늘날 랜드마크 빌딩을 건설하는 것과 같지 않나요?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자!”는 것은 마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무릎 꿇지 않은 니므롯의 모습과 같지 않나요?” 이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역으로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나는 신을 죽였다.”라고 선언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도시는 인간 정복이 확실해지며, 이 정복에 대한 기념비라는 것을. 도시는 인간의 성공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대기업이 높은 랜드마크 빌딩을 지으려고 하는 이유도 이런 기념비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 얼마나 대단한지,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도시와 탑으로 보려 내려오셨다고 말합니다. 충격적인 것은, 하나님도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정도로 그들의 일은 대단했습니다.

 

그들의 일을 막기 위한 하나님의 특단의 조치는 무엇입니까? 

 

 

7절에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1:7] ,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의 특단의 조치는 언어의 혼잡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바벨이라는 이름이 생깁니다. 9절은 하나님께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했다고 나옵니다. 이것은 말하는 것에 대한 혼잡이라기보다는 이해하는 것에 대한 혼잡입니다. ‘바벨이라는 의미가 아카드어로는 신의 문이라는 뜻도 있지만, 히브리어에서는 그 음이 바랄과 비슷하기 때문에 혼돈’, ‘혼잡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오늘날도 이 문제는 동일한 것 같습니다. , 어떤 조직이 문제가 생기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가정도 부부가 다투거나 자녀들과 문제가 생기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커뮤니케이션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단순이 언어가 여럿으로 나타났다고 해석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이런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를 일으킨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지난 주부터 오늘 본문까지 면밀히 살펴보면, 이상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분명 함의 자손은 저주받은 자식들이며, 저주의 핵심은 종들의 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9:25) 그런데 그들은 종이 된 것 같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라면, 그들은 정복자였습니다. 오히려 믿는 자가 그들의 만든 도시의 포로였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누가 정복자입니까?

 

 

 

지난 주부터 우리가 살펴보았다시피, 믿는 자는 도시의 포로였습니다. 오늘은 최초의 바벨이라는 도시가 이후에 성경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 속 인물 중에 바벨의 포로가 된 대표적인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는 다니엘이었습니다. 다니엘은 큰 도성 바벨론 제국에서 포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 아무도 라이벌이 될 수 없는 나라였습니다. 로마조차도 비길 수 없는 나라가 바벨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보면, 바벨은 그냥 도시의 이름, 혹은 나라의 이름이 아닙니다. 바벨은 하나의 도시가 아니라, 도시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 바벨론은 도시의 대표, 표준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다니엘서 3, 4장을 참고하면, 느부갓네살 왕 때 다니엘은 바벨론의 포로였습니다. 바벨론의 왕이었던 느부갓네살 왕이 죽고, 5장에 보면 벨사살 왕이 등장합니다. 이방 땅에서 왕들이 아무리 억압한다 해도, 다니엘이 포로로 그들의 종이 되어 생활한다 해도, 그들은 다니엘의 신앙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벨사살 왕은 다니엘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정복자입니까?

 

 

 

바벨론에 대한 이야기는 다시 신약 성경의 계시록에 등장합니다.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예언은 계시록 16 19절에서 18장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16:19-20]

19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20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 데 없더라

 

 

여기에서 바벨론은 고대의 바벨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바벨은 단순한 도시의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항하는 도시 자체를 의미하지요. 바벨론은 전 시대를 통틀어 하나님을 배반하는 우상 제국을 통칭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17:5] 그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18:2]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역사상의 바벨론 제국이 멸망했듯, 하나님을 거역하는 우상 세력의 괴멸이 필연적인 사실을 18장에서 말하고 있으며, 17장은 음녀 바벨론의 심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도시를 건설한 자들, 그들은 역사상 언제나 정복자로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에 비한다면, 믿는 자들은 도시의 포로였고, 언제나 그들의 노예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믿는 자는 어떻게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까?

 

 

 

우리가 살펴보았다시피, 믿는 자는 언제나 도시의 포로였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다니엘이었습니다. 그때, 포로된 삶은 참으로 힘겹고 어려운 삶입니다. 여러분이 다니엘이었다면,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하시겠습니까? 다니엘은 수많은 역경이 닥칠 때, 구해달라고 기도했을까요?

 

[3:17-18]

17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다니엘의 이 기도는 역경에서 구해달라는 기도였을까요? 경건한 사람은 역경이 닥칠 때, 어떤 역경도 제거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유익이 될지 아닐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경견한 자는 박해했던 권력자가 자신을 풀어주기를 원할 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이것을 무조건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핍박이 제게 유익인지 아닌지 명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든 승리 중에 최고의 아름다운 승리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 승리는 어떤 정복자보다 더 큰 승리입니다. 첫째, 정복자는 다니엘의 마음 속에 있는 선한 마음을 제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는 환경 탓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핍박 당하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복음은 말합니다. 

 

[11: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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