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카리스 교회 이창우 목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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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21일 설교 및 주보
본문말씀: 야고보서 2장 8-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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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닮는가?
본문말씀: [약2:8-9]
8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야고보서 2장 1절부터 13절까지는 교회 안에서 절대 있지 말아야 할 차별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부자가 대우를 받고 가난한 사람들은 차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나라를 상속받은 사람을 우리는 무엇이라 부릅니까? 그는 ‘왕’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가난한 자들이야 말로, 부요한 자들이고,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은 왕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편애’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도 합니다. 교회가 가난한 자들을 모욕하고 부유한 사람들을 선호하였습니다. 이런 세상적인 일에 교회 안에서 일어나면 안되는데, 교회 안에서도 여전히 세속적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왕적 신분을 가진 자를 교회가 차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발생하는 이런 편애의 문제, 차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오늘 읽은 이 본문이 결국은 해결책입니다. 즉, 사도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 왕의 법(Royal Law)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차별하여 대하면, 즉 편애하면 그것은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8 Εἰ μέντοι νόμον τελεῖτε βασιλικὸν κατὰ τὴν γραφήν Ἀγαπήσεις τὸν πλησίον σου ὡς σεαυτόν, καλῶς ποιεῖτε·
헬라어로 보면, 명확하게 이 법을 βασιλικὸν νόμον(왕의 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것이 왕의 법일까요?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은 왕이 지켜야 할 법이기 때문입니다. 이 법은 차별의 법, 편애의 법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평등의 법입니다.
예수님도 이와 비슷한 일을 경험하셨습니다. 마가복음 3장 31-35절을 보면 오늘날의 사람들조차도 수용할 수 없는 주장을 하십니다. 말씀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막3:31-35]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이 말씀에서 보면, 예수님은 새로운 가족을 정의하십시다.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집과 가족을 떠나고 소유를 포기한 자들은 지금 이 세상에서 실제로 그것을 백배나 돌려 받게 된다(막10:29-30)는 약속은 이렇게 실현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그들의 가족을 잃는 대신 새로운 ‘예수 가족’을 맞이합니다.(두란노 How주석 140쪽 참고)
예수님의 제자된 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것입니다. 그들이 모든 것을 버렸는데, 어떻게 백배나 받겠습니까? 마가복음 10장 30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막10: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카리스 교회는 얼마 되지 않은 성도님들이 모여 있습니다. 오늘 본 말씀에 의하면, 믿음의 가족이 바로 형재와 자매요, 어머니입니다. “예수 가족”은 이렇게 해서 다시 탄생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육신의 가족이 아니라 영의 가족이며, 하나님 나라의 가족입니다.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들입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새로 태어난 왕적인 친족을은 왕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본문 구절입니다. 즉,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것이지요.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는 자가 나의 형제요 자매며 어머니”입니다(막3:35). 하나님의 뜻은 어디 있습니까? 바로 그것이 이 명령입니다.
그렇다면, 애인이나 친구를 사랑하지 말아야 하나요? 혹은, 육신의 어머니나 자녀들은 사랑하지 말아야 하나요?
왜냐하면 이것은 일종의 차별이나, 편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의하면, 편애, 차별적인 사랑은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은 애인이나 친구를 사랑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부모나 자녀를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닙니다. 한결같이 다정하게 애인을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하고, 부모를 사랑하십시오. 다만, 이웃사랑이 하나님과 여러분의 연합을 더욱 거룩하게 하는 요소가 되게 하십시오. 친구를 진실하고 헌신적으로 사랑하십시오. 다만, 하나님과의 친밀한 우정 속에서 서로 배는 것이 되게 하십시오.
인간은 원래 하나님과 친족관계였습니다. 창세기 1:26-27을 보십시오.
[창1:26-28]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따라서 기독교의 과업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데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왕적 신분을 가진 크리스천이 해야 할 과제이자 의무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닮을 수 있나요?
요한일서 4:9절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따라서 사도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사랑 안에서만 하나님의 동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만 하나님의 동역자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이웃을 사랑할 때만 사랑이신 하나님을 닮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편애도, 어떤 구별이나 차별도 없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친구를 사랑하는 한, 하나님을 닮지 않았습니다. 애인을 사랑하는 한, 부모를 사랑하는 한, 이런 구별된 사랑을 하는 한 하나님을 닮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차이를 버리십시오. 그래야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죽음이 차이를 제거한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모든 차이와 차별을 제거합니다. 죽음은 영원히 차이가 나는 사랑을 제거합니다.
창세기 2장 22-2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서 취하신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 주었습니다. 즉, 하나님은 먼저 옆구리에서 애인을 만들어 여러분들에게 주었습니다. 죽음이 옆구리에서 빼앗아 간 것입니다. 죽음은 다시 친구를 데리고 갔고, 빼앗아 갔지만 아무것도 남겨 놓지 않았습니다. 이제 허약한 옆구리를 가릴 애인도, 아내도, 남편도, 친구도 없습니다.
홀로 사는 것이 얼마나 낙담할 일인지, 시인에게 물어보십시오! 사랑받은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사랑받지 못한 채 홀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지 시인에게 물어보십시오. 혹은 삶이 친구와 친구를 갈라놓을 때, 얼마나 낙담할 일인지 시인에게 물어보십시오.
별을 관찰하고자 하는 사람은 일부러 어두운 자리를 찾습니다. 홀로 고독한 자리, 어두운 자리를 찾을 때만 별을 잘 관찰할 수 있으니까요. 마치 발을 관찰하는 사람처럼, 시인은 잃어버린 우정을 찾으러, 잃어버린 사랑의 행복을 찾으러 일부러 어두운 자리, 고독의 자리를 찾습니다.
애인을 찾은 것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면, 친구를 찾았으나 찾지 못한 것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면, 상실, 분리 변화가 그의 잘못이 아니라면, 이 경우에 시인은 낙담하는 것 외에 아무런 위로를 찾지 못합니다.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프시킨은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고 합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찾아오리라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괴로운 법
모든 것이 순간이고
모든 것이 지나가리니
지나간 모든 것은 아름다우리
프시킨의 시처럼, 낙담한 자 옆에서 함께 울어주는 시인이 있다면, 그래서 그가 이 사명을 감당한다면, 낙담한 자와 함께 슬퍼하는 것은 시인의 충성인가요? 이런 인간적인 충성과 하늘의 충성, 영원의 충성은 어떻게 다른가요? 먼저, 하늘의 충성 역시 시인과 똑같이 행동합니다. 복음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롬12:14-15]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크리스천도 시인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다른 건가요?
기독교는 항상 위로를 갖고 있다는 것이 다른 점입니다. 이 위로는 시인의 위로와는 다릅니다. 시인의 위로는 기쁨의 상실에 대한, 행복의 상실에 대한 “대체물”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위로는 그 자체로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왜 그럴까요?
시인의 위로는 기쁨과 행복이 상실 된 후에, 나중에 발명된 위로입니다. 먼저, 고통, 괴로움, 기쁨의 상실, 행복의 상실이 옵니다. 아, 그리고 한참 후에, 아주 아주 오랜 후에, 마침내 위로가 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위로가 나중에 오지 않습니다. 이 위로는 영원한 위로입니다. 영원의 위로이므로, 모든 시간적인 기쁨보다 먼저 있었습니다. 이 위로가 오자마자 고통이 수년의 세월일지라도 이것을 삼켜버립니다. 왜냐하면 이 위로는 여러분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고 그렇게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되었던 영원의 위로이기 때문입니다.
이 위로가 곧 기쁨입니다. 이 기독교의 위로가 기쁨이기 때문에, 기쁨의 상실에 대한 대체물도 아닙니다. 기독교의 이 기쁨과 비교할 때, 다른 모든 기쁨은 궁극적으로 불쾌감을 줄 뿐입니다. 이 땅은 이 기쁨을 선포하기에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가 스스로 이 기쁨을 박탈했으며, 박탈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영원의 기쁨이 위로로만 선포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인간의 눈이 어두운 유리를 통과하지 않고는 태양빛을 견딜 수 없듯, 인간은 위로로 선포되는 이 어두움을 통하지 않고는 영원의 기쁨을 견딜 수 없습니다.
이 기쁨을 가져다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것이 이웃사랑입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십시오.”
이미 언급했던 대로, 이웃이란 “지금 눈에 보이는 사람”입니다. 쉽게 찾을 수 있는 이웃을, 무조건적으로 언제나 찾을 수 이웃을, 여러분은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애인은 여러분을 잃은 것처럼 대우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친구를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웃이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하든, 당신은 이웃을 잃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애인과 친구가 어떻게 대하든 그들을 계속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해서 유감이지만, 그들이 정말 변한다 해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어떤 변화도 당신에게 이웃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을 붙들고 있는 것이 이웃이 아니라, 이웃을 붙들고 있는 것이 당신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이웃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면, 이웃도 변하지 않는 채로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죽음이 당신에게서 이웃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죽음이 하나를 빼앗는다 해도, 삶은 즉시 당신에게 다른 이웃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당신에게서 친구를 빼앗을 수 있습니다. 친구를 사랑할 때, 당신이 실제로 친구와 함께 있으니까요. 그러나 이웃을 사랑할 때, 당신은 하나님과 함께 있습니다. 따라서 죽음은 당신에게서 이웃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사랑과 우정에서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이런 행복을 전혀 가져본 적이 없다 해도, 당신은 이웃을 사랑할 때 아직도 최선의 것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https://youtu.be/FI6sjKm4Bi8?si=v9SSDrcQTWBkPc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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