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보와 설교

24/01/28 | 무엇이 사는 것일까? | 카리스 교회 주일예배

unclechang 2024. 1. 28. 09:02

안녕하십니까?

카리스 교회 이창우 목사입니다. 

주보와 설교 자료는 여기에서 다운로드 받으실 수 있습니다.


2024년 1월 128일 설교 및 주보

설교 제목: 무엇이 사는 것일까?

본문말씀:  마태복음 6:5-13, 25-26

 

아래 파일을 다운로드하시면 됩니다.

 

설교본문_240128_무엇이사는것일까?.pdf
0.54MB

 

 

사람은 살기 위해 먹습니까, 먹기 위해 삽니까?

살기 위해 먹는 사람은 마치 절대적 빈곤 가운데 있는 사람 같아 보이는 반면, 먹기 위해 사는 사람은 절대적 풍요를 누리고 사는 사람 같아 보입이다. 그 정도로 저에게는 이 질문이 양 극단을 표현하는 것 같아 보여 마음이 서글퍼집니다. 살기 위해 먹는 사람은 무엇이든 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먹지만, 먹기 위해 사는 사람은 풍요 속에서 먹을 것을 찾으러 방방곡곡을 여행하러 다닙니다.

 

우리 사회는 다양한 구성원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대다수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인 빈곤상태에 있습니다. 이것이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하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빈곤에 대해 더 많은 것을 고찰하기 위해, 먼저 우리는 상대적 빈곤과 절대적 빈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절대적 빈곤과 상대적 빈곤이란 무엇일까요?

 

빈곤의 정도가 최소한의 생활 수준조차 유지하지 못하는 정도의 상태를 절대적 빈곤(絶對的貧困, absolute poverty)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1] 조금 쉽게 설명하자면, 먹고 살 수도 없는 상태, 최소한의 생명 유지도 어려운 상태인 것 같습니다. 이에 반해, 상대적 빈곤(相對的貧困, relative poverty)이란 한 사회에서 사회구성원 대부분이 누리는 일정한 수준의 생활을 누리지 못하는 상태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2] 다시 말해, 상대적 빈곤이란 한 사회에서 평균적인 소득 수준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볼 때,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발전을 한다 해도, 그래서 절대적 빈곤 문제를 해결한다 해도 상대적 빈곤의 문제는 해결이 불가능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왜 상대적 빈곤을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미 말했다시피, 상대적 빈곤은 비교를 통한 상대적 박탈감에서 생깁니다. 이것은 진짜 빈곤이라기보다는 비교를 통해서 생성된 가짜 빈곤의 상태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상대적 빈곤을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는 비교 때문입니다. 상대와 비교하는 한, 상대적 빈곤은 해결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일을 멈출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아마, 절대적 빈곤과 상대적 빈곤을 이해하기 위해 다음 그림보다 더 적합한 것은 없어 보입니다.

 

 

남한 사람들은 아무리 힘들게 살아도 굶어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정말로 생존할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들이 있지요. 그 사람들이 볼 때, 가난하다고 느끼는 남한 사람을 보면, 웃을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속으로 니들이 가난을 알아? 웃기고 있네!”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절대적 빈곤도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이지만, 이것은 오히려 해결하기가 쉬울 것 같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경제적으로 상황이 좋아지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상대적 빈곤은 경제 상황이 좋아진다고 해서 절대 해결이 불가능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왜 들의 공중의 새를 보라고 했을까요?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새를 보는 것만이 상대적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이 제시하는 방법입니다. 복음은 절대적 빈곤도 참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절대적 빈곤은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 마지막 한계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상대적 빈곤은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상태입니다. 이 빈곤을 퇴치하기 위해 복음은 새와 백합을 보라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런 점에서 보이지 않는 적을 제거하는 영적 전투이기도 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새와 백합을 으로써 어떻게 가난의 염려, 빈곤의 염려를 극복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새는 무엇을 먹고 살까요?

복음은 공중의 새는 심지도,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지만,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신다고 전합니다. , 새는 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기르십니다. 창고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기르십니다. 새가 하는 모든 활동은 일이 아닙니다. 새는 일에 대한 의식조차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새의 상태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새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용할 양식을 먹고 삽니다.

 

 

새와 크리스천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크리스천 역시 새처럼 일용할 양식을 먹고 삽니다. 아마 그는 최저 생계, 즉 절대적 빈곤 가운데 사는 크리스천일 수도 있으며, 상대적 빈곤 속에 있는 크리스천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음식은 신선도가 떨어지지 않는 하늘의 음식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이집트를 탈출할 때, 먹었던 음식이 만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날마다 신선도가 떨어지지 않는 일용할 양식인 만나를 주듯, 절대적 빈곤 속에 있는 크리스천 역시 그런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식을 먹습니다. 이 하늘의 음식은 누구도 훔칠 수 없는 거대한 양이지요. 왜냐하면 도둑은 밤 중에 몰래 침투해 보관된 것만 훔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낮 동안에 이미 사용된 것을 훔칠 수 있겠습니까![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왜 거대한 양인지는 미결된 상태로 남겨두겠습니다. 훔칠 수 없는 이 양식, 만나처럼 보관할 수도 없는 양식, 하지만 일용할 양식은 절대적 빈곤 대상에게도 가장 인색하게 측정된 양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일용할 양식은 거대한 양인 동시에, 가장 인색한 양식이기도 합니다.

 

 

새와 가난한 크리스천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첫째, 새는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 기도하지 않는 반면, 크리스천은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새는 일하지 않는 반면, 크리스천은 일용할 양식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셋째, 새는 보관해야 할 창고가 없는 반면, 크리스천은 보관해야 할 창고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더 가난한가요?

일단, 새는 가난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새가 크리스천에게 선생인 이유입니다. 새는 가난하지만 가난하지 않습니다. 새는 일하지도 않을 뿐더러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 누구도 새가 가난하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는 아예 가난에 대한 지식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새는 가난에 대해 무지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새의 상태가 가난이라 해도 가난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지요.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이방인은 가난한 크리스천이 새보다 더 가난한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크리스천은 더욱 엄밀히 말해 가난하지 않고 부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다시 새와 크리스천의 차이점을 말하지 않을 수 없군요.

 

 

새는 기도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일용할 양식을 얻는 반면, 크리스천은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고, 이런 점에서 기도로 염려를 떨쳐버립니다. 주님께서 이 기도를 가르쳐 주셨기에 그는 기도합니다. 그는 한밤중에 보관할 것도 없습니다. 새는 내일의 염려에 대해 무지합니다. 새가 아무리 먼 곳을 보고 아무리 멀리 날아갈 수 있다 해도, 새가 볼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일입니다. 새는 내일을 볼 수 있는 눈이 아예 없어, 내일의 염려에 대해 무지한 반면, 크리스천은 기도함으로써 내일의 염려에 대해 무지해집니다. 결정적으로, 새는 은인에 대해 무지합니다. 새는 일용할 양식을 준 자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반면, 크리스천은 기도할 때 은인을 알고 감사하는 일을 잊지 않습니다.

게다가, 새나 모험가는 양식을 구하러 나갑니다. 그리하여 그가 찾은 곳에서 일용할 양식을 얻지요. 반면, 크리스천은 기도함으로써 양식을 구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일용할 양식을 찾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누가 더 가난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직도 여러분은 이방인처럼 가난한 크리스천이 새보다 더 가난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게다가, 일용할 양식에 덤으로 생긴 넉넉함이 있다는 것을, 크리스천은 이해합니다.  넉넉함이란 무엇일까요?

 

이것은 새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가치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방인조차 이 가치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직 크리스천만 일용할 양식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는 이 초라한 선물이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길에서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빵 한 조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빵은 아무런 가치도 없을 뿐더러, 행여나 빵에 문제가 있을 것 같아 그냥 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을 담아 빵 한 조각을 줄 때, 아무리 이것이 초라한 선물일지라도 이것이 얼마나 무한한 가치를 지니는지요! 과연 받은 사람은 이것을 모르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넉넉함의 의미입니다. 일용할 양식에는 이런 넉넉함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고요, 이것이 미결 상태로 남겨둔 거대한 양의 비밀이기도 합니다. 이 비밀을 이해한 자에게 복이 있을지라!

 

 

새는 살기 위해 먹고, 이방인인 먹기 위해 삽니다. 이것은 사는 것일까요?

새는 마치 절대적 빈곤 가운데 살아가는 것처럼 살아가는 반면, 이방인은 절대적 풍요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이것은 과연 사는 것일까요?

가난에 대해 무지한 새의 삶, 그래서 이방인은 새가 가난하지만 가난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감사가 없는 새의 삶, 그래서 은인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새의 삶은 가난하지 않는 건가요? 하지만 가난한 크리스천, 그는 날마다 은인을 기억하고, 또 기억하며, 그 은인이 얼마나 사랑해서 일용할 양식을 주셨는지 날마다 그 은인을 잊지 않는 삶을 삽니다. 그러면 새와 크리스천 중에 누가 더 가난한 것입니까? 은인을 망각하고, 감사가 없는 새의 삶은 가난에 대해 무지하더라도, 크리스천에 비해 한 없이 가난한 것 아닌가요?

이런 점에서 본다면, 은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 이것만이 사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부한 이방인은 부한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첫째, 부한 이방인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가 만족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경제학에서도 밝혀진 바 있습니다. 경제학의 가정에 의하면,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지만 그 재화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항상 부족한 상태에 있다고 합니다. 부한 이방인이 아무리 부자여도, 아무리 풍부해도 만족을 모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때 성경은 말합니다. 

 

[145:14-16]

14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들을 붙드시며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는도다

15 모든 사람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16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나이다

 

 

이 말씀은 오직 만족을 주시는 분, 그 은혜의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에 만족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한 이방인은 만족할 수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가 하나님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은 존재망각에 빠졌다고 비판한 바 있지만, 더 엄밀히 말한다면 하나님 망각에 빠졌다고 말해야 합니다.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이방인은 평생 먹을 수 있는 양식을 한 번에 받습니다. , 아닙니다. 더 크게, 더 대단하게 그는 자신의 자손 전체가 받을 수 있는 양을 미리 한 번에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부자가 됩니다.

이방인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는 이 모든 것을 자신의 능력 때문인 것으로 착각합니다. 마치 외식하는 자들처럼,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꼭 알아야 합니다. 은밀한 중에 행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기 좋아합니다. 기도도 사람들이 많이 보는 곳에 가서 합니다. 그의 머릿속에 은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자신의 근면, 성실과 노력으로 이룬 성공입니다. 그때 그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를 원했고, 그런 방식으로 그의 은인을 망각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착각의 본질입니다! 그렇다면, 부한 이방인의 먹기 위해 사는 삶, 은인을 망각한 이 삶은 부한 건가요?

 

 

사는 것이란 무엇인가요?

이미 나누었다시피, 가난한 새는 가난하지 않습니다. 가난에 대해 무지하니까요. 그러나 이런 새도 가난한 크리스천에 비하면, 여전히 가난합니다. 아니,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가난합니다! , 생명의 은인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것, 그것은 얼마나 가난합니까! 은인에게 감사할 수 없는 것, 그리하여 기도할 수 없는 것은 얼마나 가난합니까!

새는 이방인이 아닙니다. 새는 가난한 중에 가난에 대해 무지하며 그리하여 은인에 대해서도 무지하여 감사와 기도를 모르는 반면, 부한 이방인은 풍요로우며, 은인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은인에 대해 망각하는 삶을 삽니다. 쉽게 말해, ‘자뻑하는 삶을 살아 갑니다. 그리하여 감사할 줄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새와 이방인 중에 누가 더 가난합니까? 이방인이야말로 가장 가난한 것은 아닌가요?

따라서 사는 것이란, 기도할 수 있는 것, 감사할 수 있는 것, 은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정 부한 것인가요?

가난한 크리스천의 부함이란 정확히 이 하나님, 단 한 번도 그에게 이 땅의 부함을 허락하지 않는 그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해,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허락하신 그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4]

 

날마다! 그렇습니다 날마다 가난한 크리스천은 은인을 깨닫는 때를 갖습니다. 기도하고 감사할 때를 갖습니다. 그의 부함이란 기도하고 감사할 때마다 더욱 증가합니다. 그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고 하나님이 그를 위해 존재하는 일이 더욱 명확해질 때, 그의 부함은 더욱 증가합니다. 반면, 부한 자가 기도와 감사를 잊을 때마다 이 땅의 부함은 점점 더 가난해집니다.

 

평생 동안 단 한 번에 그의 몫을 받는 것은 얼마나 가난합니까! 그러나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받는 것은 얼마나 부합니까! 날마다 자기가 받은 것을 망각하는 때를 갖는 것은 얼마나 가난합니까! 그러나 날마다 자기가 받은 것을 기억하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지요![5]

 

 

 

 

 

 

 

 

 

 

 



[1] 두산백과 절대적 빈곤 참고.

[2] 두산백과 상대적 빈곤 참고.

[3] 쇠렌 키르케고르, 이방인의 염려 이창우  (세종: 카리스 아카데미, 2021), 48.

[4] Ibid., 55.

[5] Ibid., 56.